메리시콜에 대한 삽화

메리 제인 시콜(Mary Jane Seacole, 1805년 ~ 1881년 5월 14일)

(이 그림은 위키백과에 나온 그림을 가져온것이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한 액자가게에서 메리 시콜의 초상화가 발견됐다. 

그림 속 노년의 흑인 여성은 왼쪽 가슴에 터키, 영국, 프랑스에서 받은 3개의 훈장을 달고 있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자메이카에서 온 메리 시콜이었다. 메리 시콜은 180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인이었고 어머니는 자메이카 흑인인 물라토였다.


 메리 시콜은  약초와 질병에 대한 지식이 많은 어머니에게서 전통요법을 전수 받았다.그리고 성인이 된 메리 시콜은 백인남자인 호레이쇼 시콜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요절했다. 




(메리시콜의 어린시절 (한성원, 김경옥작가 공동작업2017))






이후 재혼하지 않은 메리 시콜은 의학지식을 쌓는데 매진했고 마을 사람들은 당시 어떤 의사보다 메리시콜을 더 신뢰했다.


자메이카 당국은 메리 시콜에게 군대에서 병원을 운영해 달라고 요청했고 메리 시콜은 자메이카 군병원에서 일하게 됐다. 이후 1853∼1856년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메리 시콜은 전쟁터로 나가 다친 병사들을 간호하기로 마음먹었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국으로 건너가 간호단에 지원했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했다. 


모든 영국의 간호단에서는 메리 시콜이 흑인이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도 메리 시콜을 쓰지 않았다.결국 메리시콜은 자비를 털어 배를 타고 크림반도로 향했다. 


전쟁터 후방에 차려진 간호단을 찾아간 메리 시콜은 또 다시 거절을 당했다. 얼마 후 메리 시콜은 최전방에 직접 치료소를 차렸다. 메리 시콜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치료법을 개발하려 노력했고 이로 콜레라까지 치료하기에 이르렀다.메리 시콜은 사비를 털어 음식을 마련해 병사들을 돌보았고 이는 병사들에게 감동까지 전했다. 

죽음에 무방비로 노출된 병사들이 홀로 쓸쓸하게 죽어가는 현장에서 가족 대신 병사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당시 병사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였다. 참혹한 정잰터에서 메리 시콜은 수많은 병사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한성원, 김경옥작가 공동작업2017))


크림전쟁 이후 개혁과 도덕주의를 표방한 영국이 나이팅게일로 인해 간호사의 불결하고 잔인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나이팅게일을 적극적으로 알렸고 메리 시콜은 현실에서 외면당했다. 메리 시콜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 부어 치료소를 운영하며 병사들을 위해 최전방을 누빈 희생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크림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은 나이팅게일과 함께 메리 시콜도 인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리 시콜의 존재는 나이팅게일에게 가려져야 했다.종전 후 병사들은 메리 시콜의 집을 매일 찾아가 그녀의 노후를 돌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메리 시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초상화에 그려진 3개의 훈장은 병사들이 영국과 연합국이던 국가를 찾아가 메리 시콜을 추천해서 수여됐던 훈장이었다. 초상화는 이 때 메리 시콜의 존재를 알게 된 화가가 그렸던 그림이었다.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던 메리 시콜은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메리 시콜의 초상화는 수십년 동안 분실 됐다가 어이없게도 액자의 뒤에 다른 그림을 보호하는 종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로 메리 시콜은 다시 주목을 받았고 세계 전역에서는 메리 시콜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녀의 초상화는 현재 영국 런던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후 병사들의 모습  (한성원, 김경옥작가 공동작업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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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이처럼 가장 중요한 때는 오로지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도 '지금'만나고 있는 사람이라오.... 왜냐하면

이후에는 다른 어떤 사람과 어떤 일로 부딪히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오.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이란 '지금' 

만나는 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며, 인간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진 것이라오"



작업한 그림을 정리중인데 이그림은 금성 영어 교과서에 수록된 그림중 한컷이다.

조금 고전의 분위기를 살리고자 다소 무게감있게 채색한 그림이다.

작업의 과정동안  감사한 편집자분때문에 마무리까지 즐겁게 작업했으며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올해초까지 일로서 연락을 했는데 항상 그때마다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시니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할수없는 

클라이언트 1순위에 들어간다. 이렇게 대해주시는 편집자분은 손에 꼽는다. 아마 날을 새야해도 그려드릴듯 



일정이 급할때는 내용 머리로 받아들이고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렇게 맘에 와닫는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할때가 있다.



이 이야기에 담긴 진리를 아이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 아들도 항상 'now!! 지금!!!'을 외친다 ^^

 

책속에는 학문과 지식 뿐 아니라 진리가 담겨있으니 나도 스마트폰 대신 책을 좀더 가까이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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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부터 계원예술대학교에서 "공연과 광고 영상에서의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강의를 하게되었다

오프라인상의 일들은 생물과 같아서 어떻게 진행될지 나역시 궁금하다.

과장없이 진행하고 설명할것인데 서로에게 유의미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유의 말 버릇에 조는 학생들이 많지않았으면ㅎㅎㅎㅎ



어제는 강의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해서 올리라고 했다.

성격상 뒤로 미루는것이 싫어서 부랴부랴 직접 만들었던 작품들의 영상을 편집하고 그 소스들을 

유명 유투버인 비디오클라스 '하줜'님의 템플릿을 사용해서 제작했다. 오리지널 디자인은 Apple이다. 역시 대단하다. 물론 둘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pWicUiN7M   이곳을 따라가면 나온다!

('하줜'님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ㅎㅎㅎ 이글은 볼리가 없겠지만 고마운건 고마운거다!!!!)




소개동영상은  이렇게 만들었다. 조금 읽기가 어려운듯해서 부분부분 타이밍을 느리게 조정했는데

더이상 조절하다가는 오리지널의 분위기가 깨질듯해서 이정도로 타협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Vav6W7o2uc&t=9s

이렇게 유투브에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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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작업실근처에서 허름한 매일 별로 손님이
없던... 쭈꾸미 식당. 우리식구들은 기억남는 하루를 보냈던 장소와 시간이다
이그림은 오늘 아내가 키즈카페에서 그렸는데 맘이 움직인다. 아 좋다~~~ 별 이유없고 그냥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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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우리 아들이 '3.1절이 뭐야~~?'라고 물어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무심코 네이버 메인화면을 보니 3.1절 일러스트가 보인다.



나는 신기하게도 1900년대 초반부터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기적으로 그림으로 기록하게 된다.

 

대학4학년때 졸업전의 주제는 1900년대  역사를 기록하는 것 이었는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고 첫 개인전을 할 때의 소재역시 그 당시의 기록의 연장이었다.

그러다가 작년에는 kbs의 의뢰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의 메인 일러스트작업을 하게되었는데

참으로 묘하게 반복하게 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을 모으고 표현의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도 그러한 과정의 하나가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획의도를 다시한면 보자면

"전쟁이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전쟁은 의로운 명분으로 시작되어 승리와 패배로 끝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달라진다.

그 최전선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다.

난징대학살, 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광기와 폭력. 그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여자

들의 이야기.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구술사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구술사"라는 말이 맘이 이상해진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길원옥 (1928.10.23.)할머니

“노래가 있는 곳에는 웃음이 있는데 쓸 데 없이 앉아서

남의 흉이나 보다간 웃음이 없거든. 그러니 노래가 좋지. ”

“제가 겪은 게 조금 아프면 안 할 텐데 많이 아팠거든요.

내 후손들은 절대 나같이 당하지 않고 좀 편한 생활 살았으면 좋겠다. “


 이옥선(1927.10.10.) 부산 출생


15세 부산진 우동집→울산에서 위안부로 연행 이후 중국 위안소에서 생활

해방 후 첫 번째 남편과 결혼 실패.

두 번째 남편과 결혼. 남편에게 지적장애 아들이 있었음. 결혼 당시,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고백했더니, 그런 것은 상관없다. 있는 애를 잘 키우면

제일이다 이야기 들음.

이후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여러 식구를 홀로 먹여 키움.

온 마을의 아기를 받아주는 산파, 노상 등을 하며 집안의 실질적 가장역할

을 함.


 미야무라 후미코 (95세)


1945년 3월 23일 작은 섬 부터 미군이 상륙.

방공호에 숨어있으면서 주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장면 목격.

미군은 도깨비와 같다는 제국주의 주입을 통해 미군에게 잡히기 전 자결.

여성은 미군에게 잡히면 강간을 당하고 남성은 육신이 찢긴다는 사상 때문

에 가족 중 남성이 부인, 딸을 죽이는 일 발생.

할머니 가족 중엔 젊은 남성들이 모두 징집되었고, 가족과 잠시 헤어져 여

러 방공호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살 수 있었음.


(샘플영상속의 음악은 이 다큐멘터리의 음악을 담당하신 작곡가분의 곡중의 하나임을 밝힌다.)




Posted by hy graphic 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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